쿠팡에서 온전하게 한 해
이 회사에서 이직할 수 있을까요?
2021년의 여름과 가을 사이, 토스의 UX 라이터가 된 구슬님과 만나 저녁식사를 했다. 토스와 쿠팡 UX 라이터의 만남이라니, 상상만해도 너무 재밌지 않은가.
그런데 대화하다보니 의도하지 않게 누가누가 더 만족하느냐 대결처럼 되어버렸다. 둘 다 업무만족도가 너무 높았던 것이다. “지금 회사에서 이직할 수 있을까요?”라고 이야기하는 상대방을 보다가 문득 ‘이게 현재 있는 곳에서 벗어날 수 없을 거라는 무력감에서가 아닌, 현재 있는 곳에 대한 만족감에서도 나올 수 있는 말이구나’ 싶었다. 나 역시 최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구슬님과 나는 닮은 점이 많다. 잡지사에서 커리어를 시작했고, 이후 스타트업에서 콘텐츠 에디터를 하며 IT회사에서 콘텐츠를 하는 것에 대해 고민했다. 구슬님이 그랬듯이 나 역시 20대를 인간관계와 커리어에 대한 고민으로 꽉 채웠다. (특히 커리어)
그러다가 우연히 UX 라이터라는 직무를 알게 되고, 지금의 회사에 오게 되었다.
쿠팡에서 온전하게 1년을 보낸 2021년은 확실히 안정감도 생기고, 일도 재밌고, 팀이나 동료들도 좋고, 여러모로 만족스럽다고 느껴졌다. 그런데 구슬님이 “어떤 점이 그렇게 만족스러워요?”라고 물어봐서 구체적으로 어떤 점에서 만족감을 느끼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나의 경우에는 여러 내재적 가치 중 내게 가장 중요한 가치가 ‘성장’과 ‘동료’인 것 같다. 이전 회사에서 답답하거나 이직하고 싶다는 생각이 가장 많이 들었을 때가 ‘이 회사에서 성장할 수 없다’는 느낌이 들었을 때이다.
그런 점에서 쿠팡은 워낙 회사 자체가 빠르게 크고 있기도 하고, 동시에 다양한 프로젝트가 이뤄지고, 마케팅적인 글쓰기를 주로 해오던 나로서는 UX는 새로운 분야를 접할 수 있다. 짧은 시간동안 치열하게 커온 회사다보니 조직문화도 성장지향적이다. 성장하기에 이토록 좋은 환경이 또 있을까 싶다.
또 팀에서 내가 가장 저연차고, 다른 5명의 시니어와 함께 일할 수 있는 것도 내게 큰 기회다. 1명의 UX Writer도 없는 기업이 아직 많은데, 한 명도 두 명도 아닌 6명이나 되는 UX Writing 조직은 국내에 몇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전 회사에서는 늘 혼자 글쓰고, 혼자 고민했기 때문에 이렇게 같은 직무의 ‘부족'을 만난 게 난 정말 기쁘다. 또 약 100명 정도 규모의 Product UX 조직에서 Product Designer, UX Researcher 등 다양하고 멋진 동료를 만날 수 있고, 매일 협업해서 새로운 피처를 만들어간다.
성장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김에 2021년을 회고해봤다. 업무적으로 굉장히 성장한 한 해였는데, 어떤 점에서 성장했다고 느끼는지를 3가지로 정리해봤다.
회사에서 제공한 교육
작년까지만 해도 대기업의 조직문화에 적응하는 것이라던지 UX 조직에서의 사고방식, 업무적으로 요구되는 퀄리티에 종종 버거움을 느꼈었다. 그러다 올해 초에 쿠팡 내 UX 조직의 신규입사자에게 제공되는 교육을 들었다. 사실 내가 입사할 때까지만해도 신규입사자를 위한 교육프로그램이 따로 없었는데, 2020년 말 커리큘럼이 생겼다. 나는 입사한 지 일년이 되었지만 원한다면 신청하고 들을 수 있다고 해서 2주로 구성된 교육을 듣게 되었다.
쿠팡 UX 조직은 문제해결에 굉장히 포커스 된 조직이다. UX Writing 업무 시 협업하는 동료들(주로 프로덕트 디자이너)을 지켜보며 콘텐츠 전략가도 문제를 해결하려는 UX적인 사고방식이 필요하다고 느끼던 차에, 필요한 교육을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 뿐만 아니라 리서치 팀에서 제공하는 UT 관련 교육도 들어서 원한다면 직접 UT를 진행할 수도 있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이때의 교육이 업무적인 실력 향상에 큰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원페이저 정리의 습관
쿠팡에서는 아틀라시안 위키를 쓰고 있다. 아무래도 거의 100% 재택근무를 하고 있고, 기록 및 공유가 중요한 분위기다보니 위키가 활발히 사용되고 있다. 그와중에 콘텐츠 전략님은 작년에 급격하게 성장했다보니 (1명의 콘텐츠 전략가에서 6명으로 늘어남) 아카이빙의 중요성에 대해 올해 들어서면서부터 이야기되고 있었다.
나도 아직 완전히 익숙해진 건 아니지만 그때그때 내가 한 업무를 기록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그렇게 했을 때 미래의 내가 봤을 때에도 당시에 작업한 컨텍스트를 알 수 있어서 도움이 되고, 추후에 같은 팀원이 비슷한 일을 할 때에도 내가 작업한 것을 보며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또 나의 사고방식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것이, 결과적으로 업무적인 실력 향상에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소프트스킬에 대한 진지한 고민
작년에는 메일 쓰기, 매니저와 소통하기 등 대기업에서의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기본적인 것들을 익혔다면 올해는 좀 더 정교한 소프트스킬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나와 상대의 관점이 다를 때 어떻게 타협할지와 같은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직무끼리 보는 관점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올해 제대로 이해하게 된 것 같다. 예를 들어 나는 UX Writing 업무를 할 때 주로 프로덕트 디자이너에게서 요청을 받는다. 디자이너는 UX적인 관점에서 접근하고, 나는 콘텐츠 전략가로서 UX적인 관점도 취하지만 동시에 보이스앤톤이나, 콘텐츠적인 디테일을 꼼꼼히 보게 되다보니 의견이 다를 때도 있다. 또한 작업 후 PO와도 싱크를 맞춰야하는데, PO는 비즈니스적인 관점으로 보기 때문에 또 의견이 다를 때가 있다.
예시로 리뷰 작성자에게 보상을 주는 리뷰 프로젝트를 한 적 있는데, 그때 각 상품별로 선착순으로 10명의 리뷰작성자에게 보상을 주는 프로그램의 이름을 ‘선착순 리뷰 프로그램’으로 할지 ‘얼리리뷰 프로그램’으로 할지에 대해 콘텐츠팀과 디자이너의 의견이 달랐던 적 있다. 콘텐츠에서는 좀 더 직관적인 이해를 위해 ‘선착순 리뷰’를 원했고, 디자이너들은 ‘얼리리뷰’라는 이름으로 다소 덜 직관적이더라도 브랜딩이 되기를 원했다. 이때 의견을 조율하기가 어려워 결국 두 가지 방향으로 모두 시안을 만들었다. 그리고 UT를 통해 ‘얼리리뷰’가 고객이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는 걸 알게되어 결국 ‘선착순 리뷰’로 결정/진행되었다. 사소한 사례지만, 이렇게 의견이 다를 때 감정적으로 접근하기보다는 UT와 같은 객관적인 자료로 설득하고, 콘텐츠에 있어서는 나의 전문적인 관점을 취해 설득하되 만약 내 의견이 틀렸다는 것이 입증되면 빠르게 포기하고 팀원들과 얼라인하는 방법 등을 배웠다. 또 아무래도 전반적인 피처를 얼리 스테이지부터 검토하고 디자인하는 것은 디자이너와 PO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방향성을 최대한 싱크하여 오해의 소지를 줄이고, 만약 작업 중 의견이 다른 점이 있다면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서로 근거를 이야기하고 타협점을 발견하는 데에도 이전보다 능숙해졌다.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유튜브에서 소프트스킬 관련한 영상을 보기도 하고, 같은 팀의 시니어에게도 조언을 구하고, 업무를 대하는 관점이 다른 동료에게 1:1 미팅을 요청해 대화를 나눠보는 등 나름대로 부딪히며 노력을 많이 했던 것 같다. 이 모든 과정이 돌이켜보니 정말 가치있었다.
지금 회사에 와서 ‘내가 있는 곳에서 이렇게 만족할 수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지만, 사실 이런 느낌이 드는 게 처음은 아니다. 2019년 말 프리랜서 생활을 하며 심적으로 고비를 겪은 적 있다. 그때 ‘나는 혼자 일 하는 게 정말 안 맞아’라고 생각했고, 취업 준비를 열심히 했는데, 쓰는 곳마다 잘 안 돼서 좌절했다. 지원한 곳이 다 떨어지니 하루하루 잠이 안 오던 때였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어떻게 되든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래가 불안하다거나 외로울지언정 어쨌든 내게 일을 주는 클라이언트가 있고, 먹고 잘 수 있는 집이 있고, 무엇보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는데 무엇이 문제인가. 앞으로 어떤 미래가 펼쳐지더라도 지금까지의 선택에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라고 말이다. 그 뒤로 내가 처한 환경에서 불만을 찾기보다는 감사한 점을 찾아야겠다고 마음가짐을 고쳐 먹었다. 취업 활동도 이전처럼 절박하게 하지 않았다. 그렇게 몇 달을 미래가 불확실하지만 현재에 만족하는 상태로 지내다가, 링크드인을 통한 연락으로 쿠팡에 취업하게 된 것이다.
만약 그때 커리어적으로 완전 바닥을 겪지 않았다면 나는 어디를 가든 욕심내고 이직하고 싶어하는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더 성장하고 싶어. 더 만족하고 싶어. 더, 더!’라는 생각이 내 안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런데 마음가짐을 다르게 하고 보니, 또 시간이 지나고 돌아보니 힘들거나 불만스러웠던 곳도 배울 점이 많았다. 좋은 사람도 많이 만났다. 결국 어디에 있든 최선을 다하면 된다. 물론 지금 있는 조직에 들어온 것은 정말 행운이지만, 앞으로의 인생을 살면서 어디를 가더라도 만족할 수 있다는 이상한(?) 자신감이 생겼다.
사실 업무적인 것 말고도 2021년에 느낀 것이 많은데,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현재 있는 곳에서 만족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 그 계기가 된 것 중 하나가 계속되는 재택근무다. 2020년에는 코로나가 끝나면 출근하겠지라는 기대가 있었는데 2021년에 스마트오피스로 전환되며 ‘무기한 재택근무’가 도입되었다. 즉 코로나가 끝나도 재택이 계속된다는 것이다. 그 소식을 알고 몇 주 동안 정말 우울했다. 그러다가 내가 그동안 어떤 미래의 기회를 보고 달려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코로나가 끝나면, 더 나아가서 이걸 할 수 있게 되면, 저걸 할 수 있게 되면, 이런 기회가 주어진다면, 저런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런데 왜 지금 내가 있는 곳에서 만족하지 못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나서 지금 내가 있는 곳에서 만족하기 위해 이런저런 시도를 했다. 서울이라는 도시를 사랑하기 위해서 한 파쿠르나 사진 찍기라던지, 2019년부터 하던 명상을 본격적으로 클럽하우스에서 세션을 열며 다른 사람들과 나누게 된 것 등등. 결과적으로 일상 수준에서의 만족도가 전반적으로 높아졌다.
물론 무조건 현재에 만족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고, 커리어적으로도 라이프스타일적으로도 자신이 무엇을 가치있게 여기는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렇게 나에게 가치있는 것을 찾았으면 그 방향으로 전환하는 용기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결국 모든 것이 밸런스라는 생각도 올해 많이 했는데, 지금 이 자리에 단단히 딛고 서서, 내가 지향하는 한두가지의 가치를 움켜쥐고 (마치 로프를 잡듯이) 그 방향을 바라보며 지낼 수 있다면 분명 잘 살고 있는 거라고. 올해를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그런 믿음이 생긴 것 같다.